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 15세 (문단 편집) === 플뢰리의 대신직 === 루이 15세는 섭정기 동안 플뢰리 주교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랐는데, 왕의 성품도 무난하고 머리도 좋았기에 신하들과 국민들은 루이 15세가 성인이 되면 좋은 국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플뢰리를 [[추기경]]으로 세우고 재상으로 임명하여 전권을 맡겼다. 플뢰리 추기경은 유능하여 그가 1743년에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의 전성기가 계속 유지되었다. 1726년 성년(16세[* 하지만 프랑스 법상 왕의 성년은 만 13세였다.])이 된 왕은 부르봉-콩데 공작 루이 앙리를 수상에서 면직시키고, 가정교사였던 주교 에르퀼 드 플뢰리(André Hercule de Fleury)를 추기경이자 수상으로 임명했다. 이 17년은 루이 15세의 재임 기간 중 가장 번성했던 기간으로 기록된다. 야심가였고 왕권을 강화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던 전대 [[리슐리외]] 추기경과 [[마자랭]] 추기경과는 달리 플뢰리는 비교적 온화한 성품으로 나라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는데 힘썼다. 콜베르 경제장관의 정책을 다시 적용하고, 얀센주의와의 긴장 상태를 완화하는 한편, 폴란드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1733) 신속히 문제를 정리하고 전쟁을 끝맺는데 노력했다.[* 여기서 프랑스인들의 정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대다수 프랑스 국민들은 강인한 리슐리외와 마자랭을 기억하고 동경하는 반면, 안정만을 중시했던 플뢰리는 그저 준수했던 통치자로 보고 있다. 위키백과 문서도 플뢰리가 독보적으로 짧다.] 하지만 1743년 플뢰리의 죽음으로 급작스럽게 많아진 정무에 익숙치 않던 루이 15세가 어려움을 겪는데 기조가 되었다. 루이 14세처럼, 플뢰리의 죽음 이후 루이 15세는 앞으로는 수상없이 통치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왕은 당시만 해도 1744년 'Le Bien-Aimé'(친애왕)란 이명을 얻을 정도로 인기가 굉장히 좋아 이 선언은 별 문제 없이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1749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경제 문제가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재무장관이었던 마코 다르누빌(Machault d'Arnouville)은 이를 위해 새로운 세금을 도입했다. <방티엠>(Vingtième)[* 직역하면 20번째라는 의미로 20번째 세제 개편안이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귀족 및 성직자 과세와 별개로 간접세와 관세 조정 등 일괄적인 조세정책 개편으로 이해하면 된다. 단지 앞의 두 개가 당대에는 너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다.]이라 일컬어지는 이 세금은 지금까지 세금이 면제되었던 성직자와 귀족에게도 과세되는 세금이었는데, 자연스럽게 이 두 계층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고등법원은 이에 '건의권'을 이용해 베토를 던졌고, 성직자들의 회의도 소리를 높였다. 왕에 적대적인 얀센주의자들을 상대로 주교령의 지지없이 홀로서야 할 것을 두려워한 루이 15세는 황급히 성직자에 대한 <방티엠>을 면제했다. 1757년 [[로베르프랑수아 다미앵]]이라는 남자에게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이 남자는 결국 [[앙리 4세]]의 암살범인 라바이약 때와 마찬가지로 [[능지형]] 및 [[거열형]]에 처해졌다. 이로 인해, 정책을 성공적으로 끌어내지 못한 루이 15세는 애첩 [[퐁파두르 부인]]의 조언에 따라, 인기가 떨어질대로 떨어진 마코 다르누빌을 해임하기로 결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